
“이게 말이 돼요?”
식탁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푹 파묻은 혜연이 웅얼거렸다. 마주 앉은 은창은 쓴 입맛만 다실 뿐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냐구요, 무어가 그리 억울한지 한 번 더 한탄한 혜연이 마침내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생일 날 철야에 야근이라니!”
그러게, 은창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째 타이밍이 참 별로다.
***
“미안해, 혜연아. 아빠 오늘 늦을 것 같아.”
전날 경찰서에서 밤을 새느라 집에도 들어오지 못하신 분이 오늘 아침 전화로 하신 말씀이란다. 요즈음 부쩍 바쁜 모습에 불안하다 했는데, 결국 현석은 생일날 하루를 고스란히 경찰서에 헌납했다. 덕분에 미역국을 끓인다며 준비를 다 해놓은 혜연은 입이 댓 발 나오게 됐다. 일이 많으신가 봐, 하고 그녀를 위로해야 할 역할의 은창은 글쎄, 지금 이쪽도 그다지 어른스러울 속은 못되는지라.
“일단, 혜연아. 학교 가야지.”
“네, 그래요...”
준비해놓은 걸 그냥 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미역국은 끓였는데, 혜연은 생일의 주인공 없이 그걸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적잖게 속상한 모양이었다. 기운 없이 숟가락을 움직이며 그녀가 중얼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쌀 걸 그랬나 봐요.”
“도시락?”
“네, 아빤 도시락은 꼭 다 먹고 오시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라도 전해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도시락을 싸기 위해선 몇 시간이나 당겨 기상해야하니 혜연의 수면시간이 걱정되는 발언이었지만,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했다.
“...점심시간에는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뭐가요?”
“도시락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오빠가 싸게요?”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탓에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 얼굴에 화색이 도는 듯 싶었다.
“그럼 되겠네요! 미역국도 담아가고!”
“뭐, 그렇지...”
그 뒤로 한결 밝아져 식사를 마친 혜연은 국을 담을 보온병과 도시락 통까지 전부 내어주고 학교에 갔다. 오빠, 부탁해요! 하는 응원을 남기고. 할 수야 있지만, 바쁜데 대뜸 제가 찾아가도 되는건지, 그제야 조금 걱정이 됐다. 혜연이가 속상해 한다는 둥, 그래도 생일인데 미역국은 챙겨드려야 하지 않겠냐는 둥 핑계는 댔어도 실은 못 본지 하루를 넘겨가는 얼굴이 그리웠던 거라서. 기껏 도시락을 가져갔는데 자리에 없어서 그냥 두고 나오게 되면 어쩌나하고. 혜연을 배웅하고 멀뚱히 도시락 통을 바라보던 은창은 이내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경감님? 전데요...”
***
- 점심? 뭐 그 땐 서에 있을 건데... 응? 어어... 알았어, 여기 있을게. 근데 왜?
현석의 약속을 받아내고 만들기 시작한 도시락은 간신히 점심때를 맞추어서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혜연이 끓여둔 미역국을 데워 보온병에 담고, 모든 것을 한 가방에 넣고는 은창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정은창!”
“바쁘신데 왜 나와 계세요.”
너 기다릴 시간 정도는 있어, 서 앞에서 은창을 기다리던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한 번 안아보자. 꼭 오래토록 못 보던 사람을 만난 것 마냥 은창을 끌어안았다. 몸에 묵직하게 기대어오는 무게가 전부 그의 피곤함인 것 같아서 은창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근데, 여기까진 왜 온 거야?”
“아, 이거... 도시락이요.”
“도시락? 뭐 이런 걸 싸왔어, 힘들게.”
그제야 현석은 은창을 놓아주고 도시락이 든 가방을 받아들었다. 와, 아직도 따끈따끈하네. 감탄하다가 이어지는 은창의 말에 움찔하긴 했지만.
“혜연이가 많이 속상해해서요. 경감님 생신인데, 미역국도 못 챙겨줬다고.”
“...오늘은 일찍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밤을 샜더니 일이 더 늘어났더라고.”
해도 해도 안 줄더라니까, 가벼운 한숨을 쉬어낸 현석이 이내 은창을 이끌었다.
“그럼 아직 점심 안 먹었겠네, 들어가자.”
널따란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한눈에 보아도 누가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아서, 현석은 작게 웃었다. 서툴지만 어떻게든 모양을 갖춘 계란말이 하며, 귀엽기도 하지.
“국은 혜연이가 끓인 거예요.”
“역시 우리 혜연이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리고 너도, 고마워. 은창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혜연이한테 잘 먹었다고 전해줘. 오늘까지만 일하면 내일은 정말 일찍 갈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생일, 축하드려요.”
“고마워.”
밥을 뜬 숟가락 위에 반찬을 가득 올려 은창에게 내밀었다. 자, 정은창, 아 해야지. 그냥 둬도 알아서 먹는다고 거부하던 은창이 여기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떠냐고 밀어붙이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그러기를 몇 번, 그 뒤로도 그들의 점심시간은 꽤나 느긋하게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