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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9월 1일

  더위가 한 풀 꺾였다는 기상캐스터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밤새 자료와 씨름하느라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료만 분석하면 오늘 하루는 쉬는 날이다. 마지막 남은 업무를 시작하기 전, 기지개를 펴고 혜연이에게 전화했다. 매일 하는 일이라 이제는 이 시간 즈음되면 습관적으로 전화기에 손이 간다.

  “혜연아, 잘 잤어? 선풍기 틀고 자지 그랬어. 아, 그 정도는 아니었고? 아빠야 당연히 잘 잤지. 그래, 학교 잘 다녀오고 갈 때 차 조심! 나중에 보자~”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혜연이의 밝은 목소리에 힘이 난다. 빨리 끝내고 오늘 저녁은 혜인이랑 외식이나 나갈까.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다 날짜가 잘 맞아 떨어져서 특별한 날이 겹쳤으니 외식쯤이야. 매년 맞이하는 날이긴 하지만 혜연이와 함께 보내는 건 몇 년 만이다. 왠지 설레는 마음은 잠시 뒤로하고 자료를 선택해 분석에 집중하니 오전 중으로 일은 금방 끝났고, 수사 일은 미정 형사와 재호 형사에게 맡겨둔 채 나는 집으로 향했다.

  며칠 만에 찾은 집은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와 달리 깔끔한 성격을 가진 우리 혜연이의 흔적이겠지. 야자를 마치고 오면 피곤할텐데.. 아차, 오늘 혜연이 야자하는 날이구나. 외식은 주말로 미뤄야겠네. 설거지며 빨래까지 혹시 할 일이 없나 집안일을 둘러보는데 그 어느 하나 빠진 것 없이 잘 해둔 것을 보니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밤샘업무를 하느라 무거워진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소파에 앉았을 때,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 쓰러지듯이 잠에 들었다.

 

  예쁜 아기가 마치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간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네댓 걸음 내딛고는 풀썩 주저앉는다. 다리에 힘을 줄 수 있도록 일으켜주면 또다시 몇 걸음 걸어가다 주저앉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앉아있는 내게 기어와 다리 위에 앉는다. 어쩜 이리도 예쁠까. 힘들었을 다리를 주물러주면 간지러운지 꺄르르하면서 웃는다. 내 품 속에서 웃다가 눈이 마주치면 자신의 볼에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기분 좋을 때 자신만의 표현법이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내 딸이다.

 

  아이의 웃음만큼이나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 하얀 제복을 입고 동기들과 사진을 찍었다. 사실상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다닌 학교라 벌써 졸업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나는 경찰제복을 입고 있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온 근태 형도 졸업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주었다. 시끌시끌한 졸업식장에 서 있는 졸업생들 사이로, 작은 아이가 뽀르르 달려왔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내게 달려와 안겼다.

  “아빠! 졸업 축하해요! 이거는 혜연이가 준비한 선물!”

  달려올 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펼쳐서 내 눈 앞에 가져다 댄다. 학교에서 만든 것이라며 작은 사탕을 엮은 목걸이를 목에다 걸어준다. 혜연이를 들어 품속에 안고 있으니 사진기사가 우리 부녀의 모습을 담아주었다.

  ‘찰칵’

  강당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셔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운 좋게도 당직 다음날이 혜연이 졸업식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가주지 못해 학예회나 졸업식과 같은 다른 행사에는 꼭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꼭 지켜야지. 아빠, 아빠하면서 떼도 쓰고 울면서 안기려했던 그 어린아이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 아이가 교복을 입는다니. 같이 있어준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을까,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잘 전해졌을까.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생각들은 저 멀리로 떠나버렸다. 졸업식을 마치고 품에 가득 안고 있는 꽃다발을 들고 내게 달려온 아이가 나를 보며 부른다.

  “아빠!”

 

  순간 누군가가 날 건드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는 사복으로 갈아입은 혜연이가 있었다.

  “몇 번 불렀는데 이제 깨셨네. 아빠 많이 피곤하신 건 알지만 오늘만큼은 안돼요. 저녁은 같이 먹어요. 미역국 끓여뒀는데 자느라 못 먹는 건 아깝잖아요?”

  자는 동안 몇 개의 꿈을 꾼 건지 대여섯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똑딱거리는 시계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지 않느냐는 내 표정을 본 혜연이는 아빠 생신이라서 저녁은 같이 먹고 싶다고 담임선생님께 간곡히 부탁해서 야자는 빼고 왔다며 미역국을 그릇에 담는다. 딸아이가 직접 끓인 미역국인데 빨리 먹어야지. 의자에 앉으니 혜연이는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며 노래를 불러준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빠 생일 축하합니다!”

  초에 붙은 불을 끄고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여느 때처럼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도 듣고 친구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생일이지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 2016 by mandyu99 and 4141_41414l41

Happy Birthday to you - 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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